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겐페이 합전]]의 시작 === 5월 10일에 키요모리가 교토로 올라와 교토 안에는 무사들이 가득했다. 14일에 고시라카와인이 무사 300기(騎)의 경호를 받으며 하치조호몬가라스마루 저택(八条坊門烏丸邸)으로 옮겨졌는데,[* 《햐쿠렌쇼》는 후지와라노 도시모리(藤原俊盛), 《교쿠요》는 후지와라노 스에요시(藤原季能)의 저택이라고 했다.] 이는 모치히토 왕(以仁王)의 모반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모치히토 왕의 거병은 단번에 진압되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치조인(八条院) 쇼코 내친왕(暲子内親王)의 존재가 있었고, 고시라카와인이 자신과의 관계가 밀접한 온죠지, 앞서 칸파쿠 마쓰도노 모토후사의 유배건으로 반발하고 있었던 고후쿠지와 뜻을 함께한 것은, 성립한 지 얼마 안 된 다카쿠라 상황의 인세이에 큰 위협이 되었다. 6월 2일에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적대세력이 가득한 [[교토]]를 버리고 헤이케의 본거지인 후쿠하라로의 행행(行幸)을 강행했다. 이곳은 현재의 고베시로, 고베시가 무역항이 있는 대도시로 번성한 걸 생각한다면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안목은 정확했다고 볼 수 있다. 고시라카와인도 강제로 동행하여 후쿠하라의 타이라노 노리모리(平教盛)의 저택에 들어갔다. 후쿠하라에서의 새로운 도읍 건설은 준비 부족으로 난항을 겪었고, 귀족들뿐 아니라 헤이케 일문이나 다카쿠라 상황, 엔랴쿠지 모두 반대하고 있었다. 10월에는 '''후지 강(富士川) 전투'''에서 헤이케군이 대패하는 등 군사적인 정세도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키요모리도 천도를 포기하고 교토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11월 23일에 후쿠하라를 출발한 일행은 26일에 교토에 도착했고, 고시라카와인은 로쿠하라 이즈미도노(六波羅泉殿)에 들어갔다(《잔카이기》). 30일에 도고쿠(東国, 동국)에서 일어난 역란(逆乱)으로 구교들의 의정이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후지와라노 나가카타가 고시라카와인의 인세이를 재개할 것과 전 칸파쿠 마쓰도노 모토후사의 소환을 주장하고 나섰다(《잔카이기》). 이것은 >“나가카타 경이 옳은 말을 하였다”(《햐쿠렌쇼》 11월 30일조)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직언(直言)”(《교쿠요》 12월3일조) 등으로 귀족들의 폭넓은 지지를 모았고, 16일 밤에 모토후사가 유배지 비젠에서 돌아오게 되었으며, 18일에는 키요모리가 >“법황께서 천하의 정치를 맡아보셔야 하는 이유” 를 고시라카와인에게 재삼 아뢰었다. 고시라카와인은 당초 사퇴했지만 나중에는 승락해서, 사누키(讃岐)·미노(美濃)를 인의 분고쿠로 하는 것도 결정되었다(《교쿠요》 12월 18일조). 이 시기에 다카쿠라 상황의 병세가 악화된 것이 키요모리가 이러한 양보를 하게 된 원인으로 보인다. 다카쿠라인이 붕어한다면 어린 [[안토쿠 덴노]](安徳天皇)가 정무를 집행해야 하고, 고시라카와인의 인세이를 다시 재개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러나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인의 [[인세이]]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죠지, 고후쿠지를 전소시키는 동시에 이듬해 지쇼 5년(1181년)에는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의 승강 이하를 해임시키고, 사원 소유의 장원도 몰수하는 한편(《햐쿠렌쇼》 정월 4일조), 인의 근신이었던 타이라노 도모야스(平知康), 오에 기미토모(大江公朝), 가이 겐지(甲斐源氏)의 다케다 아리요시(武田有義) 등의 위험분자들도 해관시켜 버리는 등(《교쿠요》 정월 8일조), 고시라카와인의 세력 기반을 되도록 줄이고자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